표절사례(1)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나라(奈良 텐리(天理시의 이소노카미(石上신궁에는

나라(奈良 텐리(天理시의 이소노카미(石上신궁에는

상고로부터 전해 내려온 진기한   자루가 소장돼 있으며

상고(上古)로부터 전해 내려온 국보

 이름을 칠지도 라고 한다.

'칠지도'라는

나무 가지나 창와도 닮은 이상한 모양의 칼이다……(67쪽)

이상한 칼이 소장돼 있다.(23쪽)

표절사례(2)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이 칼에는 칼날 양쪽에 각각 세 개의 가지가 있으며

칼의 양쪽에  개씩 가지를 만들어낸 특수한 형태의 검이다.

이소노카미(石上) 신궁에서는 육차(六叉), 또는 육차모(六叉)라고 부르며,

이소노카미(石上) 신궁에서는 '육차(六叉)' 또는 '육차모(六叉鉾)'라고 부르며,

『일본서기』에는 칠지도라고 기록돼 있다.(67쪽)

일본서기』에는 '칠지도'라고 쓰여져 있다.(23)

표절사례(3)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보는 이에 따라 사슴의 뿔과 같이 보여

'칠지도' 보는 이에 따라 사슴의 뿔과 비슷하다든지,

아니면 나뭇가지나 창과 비슷한 이상한 모양으로 생긴 칼이지만

나뭇가지와 같은 이상한 모양으로 생겼든자(23쪽)

지금은 비슷한 유형의 칼을 찾아볼  없다.(67쪽)

표절사례(4)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칼의 전후 표면에는 정교한  상감으로 새겨진 명문이 있어

칼의 양쪽 표면에는 정교한  상감으로 새겨진 명문이 있어

학계에서는  칼을 아주 가치 있는 유물로 간주하고 있다.(67)

한일 고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23쪽)

표절사례(5)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학계가  (칠지도) 가장 중요시하는 이유는

한일 양국에서 아주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명문에 한일고대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백○왕'이라는 백제왕의 호칭이 있고 '왜왕지' '후왕그리고 '태△사년'이라는 연호도 있고(67쪽)

'백○왕'(백제왕) '태□4사년'이라는 연호 그리고 칼을 받는 쪽인 '왜왕지'라는 명문이 있기 때문이다. (23-24쪽)

표절사례(6)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메이지 시대의 저명한 관학자인  마사토모(1824-1897) 칠지도을 신체로 모시고 있는 유명한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직에 임명된 것은 1873(메이지 6) 일이었다.(69) 

메이지 시대의 유명한 관학자인  마사토모(1824-1896) 칠지도을 신체로서 모시고 있는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직에 1873년에 임명되었다.(24)

표절사례(7)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그런데 이 불확실한 문자의 일부는  자신이  표면의 녹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고의로 삭제되었다고 주장되고 있다.(70쪽)

그런데 빠진 글자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로부터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즉 불확실한 문자의 일부는  자신이  표면의 녹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고의로 삭제되었다고 주장되고 있다.(25쪽)

표절사례(8)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그것(삭제된 글자) 칠지도의 제작 연대와 관련이 있는 연호로 ''라는 문자(泰□4) 칠지도의 제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侯王다음에 이어지는 4 글자(후왕△△△△작)라고 한다.(70)

그것(삭제된 문자) 칠지도의 제작 연대와 관련이 있는 연호인 ''자의 다음의 문자(泰□四年) 칠지도의 제작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이는 '侯王다음에 이어지는 4 글자(侯王□□□□作)이라고 한다. (25쪽)

표절사례(9)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그러나 태시 4년은 268년이며 신공 52년은 252년이기 때문에

그러나 신공 52년은 서기 252년에 해당하며 서진 태시 4년은 268년이기 때문에

"칠지도 헌상" 성립할 수가 없었다. (72)

"칠지도 헌상" 연대에는 모순이 생긴다. (25)

표절사례(10)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전후 칠지도 명문의 해석에 새로운 붐을 일으키기 시작한 학자는 말할 필요도 없이 금석문 해석의 대가인 후쿠야마 도시오였다.

전후 칠지도의 연구에 새로 관심을 보인 사람은 후쿠야마였다.

그는 1951년에 발표한 논문(이소노카미 신궁 칠지도‚)에서  사이 판독이 어려웠던 '후왕' '왜왕'이라는 용어를 새로 읽을  있게 했다.

후쿠야마는  사이에 판독이 어려웠던 '후왕' '왜왕'이라는 용어를 판독했다.

 연호 문제에 대해서도 오랫 동안 학계의 고민이었던 서진 연호의 벽을 넘어 동진의 '태화'라는 새로운 연호를 찾아내 해석의 폭의 넓리는데 기여했던 것이다.

 연호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학계의 고민이었던 서진의 '태시'가 아니라 동진의 '태화'라고 해석했다.

한자의 '' '' 통용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명문의 연호는 '大和'라고 보아야 하고이것은 동진의 '大和'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했다. (72-73)

 '' '' 통용되는 글자이며다음에 오는 글자는 '' '' 아니라 '' '' 같은 글자가 붙어진 '' 보고 '大和' 읽었던 것이다.  (27-28쪽)

표절사례(11)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후쿠야마의 주장대로 한자의 '' '' 서로 의미가 통하지만,

'' '대신 사용하는 것은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지만

금석문 명문에서 4획만으로 이루어진 '대신 억지로 12획이나 되는 ''  이유는 없는 것이다. (83)

'대신 일부러 (획수가 많아번거로운 '' 사용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설명이다. (28쪽)

표절사례(12)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영락(永樂)라는 호태왕의 독자적인 연대(391-412) 사용되고 있으나,

광개토대왕의 비문에도 ‘영락(永樂)라는 연호가 사용되고 있다.

당시 고구려와 오랫동안 숙적 관계를 지속해  백제에서도 그러한 독자적인 연호를 갖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75)

당시의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를 비교해 보면 백제는 강성기의 해당된다……고구려를 의식해 백제도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29쪽)

표절사례(13)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후쿠야마 토시오는 ‘ 또는 ‘ ‘ 소리가 가깝기 때문에 ‘百濟 ‘百滋’ 혹은 ‘百慈로도   있을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83)

(후쿠야마 도시오가) ‘百■王 ‘ ‘’ 혹은 ‘ 보고 “이들 한자는 모두 ‘ 통하며 ‘’ 혹은 ‘ ‘ 소리가 가깝기 때문에 ‘百濟 ‘百滋’ 혹은 ‘百慈  수도 있다고 본다라고 주장한 부분은 이해할  있다.(29쪽)

표절사례(14)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그리고 “백자왕·세자 경우도 마찬가지로 만일 명문이 그렇게 읽을  있다면 명문은 당연히 “백제왕여세자(百濟王與世子)” 같이 쓰여지야 한다.

그러나 명문을 “백제왕과 왕세자라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백제왕여세자(百濟王與世子)”‚ 또는 “백제왕급세자(百濟王及世子)” 같이 ‘ 또는 ‘자가 있는 때뿐이다.

왕세△ ‘왕세자 아니고 ‘왕세세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독법일 것이다. (77-78)

백제왕세세”(“백제왕 대대로라는 )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29쪽)

표절사례(15)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후쿠야마는 “(‘일단 인명으로서 생각할  있는데 이것은 ‘ 통용되고, ‘ 의미하는 天旨聖旨詔旨勅旨令旨 등의 ‘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면서

후쿠야마는 “‘ 일단 인명으로서 생각할 수 있으나 오히려  ‘ 통용되고(「荀子)大略篇引詩) ‘ 통용되고 (古本 {玉篇}第一百五所引『呂氏春秋)高誘注), ‘ 의미하며 (古本 {玉篇}), 天旨聖旨詔旨勅旨令旨垂旨高旨上旨宣旨告旨承旨稱旨 등으로 쓰일 경우의 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라는 해석 방법을 채택했다.

 뜻을 “왜왕의 上旨 비약시키며

 글자를 ‘上旨 의미로 바꾸기 위해  번이나 용어의 정의를 확대 전도시키면서

 같은 과정을 거쳐 원래 ‘下行文書였던 칠지도 명문은 ‘상행문서(上行文書) 되어 버린 것이다. (83-84)

문맥에 맞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부분만 ‘상행문(上行文) 되어 버린  같다. (30쪽)

표절사례(16)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후쿠야마 등은 ‘왜왕지 독법에 대해 이론을 제기하고 있지만 우에다쿠리하라미시나사이키이병도 김석형  적지 않은 인사가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

왜왕지 ‘상지 읽는 (후쿠야마의주장에 대해 쿠리하라 도모노부미시나 아키히데사이키 아리키요김석형소진철 등의 학자는 반대하고 있다.

[記]에는 ‘ 천자(天子)에게 알현할  “ 아무개  아무개라고 고하는 격식이 있지만   ‘왜왕지 경우는 “ 왜왕지라고 해야 한다. (86)

[예기]에는 ‘(候) 천자에게 알현할 , “ 아무개  아무개라고 하는 격식이 있으며 왜왕지의 경우도 “ 왜후지라고 해야 하며 이것은 (칠지도의명문의 표기와 일치하고 있다. (30)

표절사례(17)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구리하라 도모노부는 “명문에는 경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리하라는  명문을 보고 “문맥에는 경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장이 하행 문서의 형식으로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하사하는 형식이 되어 있다라고 주장하는 우에다 마사아키와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명문 중에는 하위자로부터 상위자에 헌납한 사실을 나타내는 구절은 찾아볼  없다 주장하는 우에다 마사아키와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칼은백제의 위기를 도운 왜왕의 공로를 칭송하여 백제의 종주국인 동진의 황제(해서공) 백제를 통해서 왜왕지에 보낸 이라고 주장하며

 칼은백제의 위기를 도운 왜왕의 공로를 칭찬하여 백제의 종주국인 동진의 황제(해서공) 백제를 통해서 왜왕지에 보낸 이라고

백제왕의 칠지도 하사를 인정하지 않는 해석을  경우도 있었다.(71)

주장하며 백제왕의 칠지도 하사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33)

표절사례(18)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우에다 마사아키는  명문을 보고 “명문의 형식이 하행서의 형식이며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주는 문체를 취하고 있다

우에다(마사아키)...... 명문의 형식은 하행서(下行書) 형식이며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내라는 문체를 취하고 있다.

 칼은 백제왕이 ‘후왕 왜왕에게  것이다.

 칼은 백제왕인 후왕인 왜왕에게  것이다.

명문의 어디에 ‘헌상, ‘공헌’, ‘드리는’, “선물로 준다 뜻이 들어 있는가?

 명문의 어디에 ‘헌상’, ‘공헌’, ‘드린다’, “선물로 보내다라는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칼을 헌상하는 상대를 후왕이라고 부르는 리가 없다나는  칼은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명쾌한 해석을 했던 것이다. (71)

무엇보다도 칼을 헌상하는 상대를 ‘후왕이라고 부를 리가 없다나는 백제왕이 ‘후왕이라고 간주한 왜왕에게 하사  칼로 간주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36쪽)

표절사례(19)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그러나왕의 선세인 개로왕 이전의 연호는 어떤 것이었는지는 사료의 부족으로 밝힐 방법이 없다.

물론 475 이전의 한성시대의 백제가 어떤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는지에 관계해서는 아직도 뚜렷한 사료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간지 연대는 “시대적 요구”에 의해 지속해  공식 연호가 아닌 사적인 연호로부터 전환된 것이라고   있다. (74)

간지 기년과 백제왕명을 사용한 사실이 금석문으로부터 확인된다. (42)

표절사례(20)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일본서기] 보아는 백제 태자등의 이름처럼 ‘가수리군’, ‘군군’, ‘사아군’와 같은 ‘-군’이라는 호칭도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백제의 ‘후왕(세자)’ [일본서기]에서는 ‘()’이라고도 표기되고 있다는 것을   있다.

따라서 ‘가수리군(개로왕)’이나 ‘군군(곤지왕)’ 백제의 ‘후왕’으로서 왜에 있었던  같다.(79쪽)

[일본서기](계체기) 보이는 ‘가수리군(개로왕)’, ‘군군(곤지왕)’, ‘사아군’, [일본서기](무열기) 보이는 ‘마나군’은 백제쪽으로 보면 ‘후왕’일 것이다.(42쪽)

표절사례(21)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416 병오일의 정오에 무쇠를  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칼은 백병(재앙) 피할 수가 있어 당연히 후왕(왜왕 )에게 주어야 한다.

태□4(백제 비유왕 4[430] 5 11[16] 병오일의 정오에 무쇠를  번이나 두들겨서칠지도을 만든다 칼은 백병(재앙·전란) 피할 수가 있으며 당연히 (왜왕 )에게 주어야 한다.

선세 이래 아무도 이러한 칼을 갖지 못했지만 백자왕은 대대 기생성음(길상어) 있어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다후세에 오랫동안 전하여라.”(77쪽)

 칼은 후왕 □□□□가 만든 것으로 선세 이래 아무도 이러한 칼을 갖지 못했다백제왕은 세세(대대석가모니의 가르침에 귀의했다따라서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다후세까지 오랫동안 전하고 가리켜야  것이다.”(49쪽)

 한눈에 보아도 장팔현과 소진철 교수의 해석이 거의 같다는 것을   있다. 장팔현이 소진철 교수의 논문을 베끼지 않고서는 이렇게 닮은 해석이 나올  없다그런데  사람의 해석에 차이가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소진철 교수의 주장은 왜는 백제의 식민지였고, 백제가 왜를 지배하고 있는 제후(왜왕지)에게 칠지도를 하사했다는 내용이다.(하사설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하계에서는 인정을  받고 있다칠지도 하사설을 지지하는 국내 연구자도 백제가 일본을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주장(분국설)에는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장팔현도 그러한 사정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소진철 교수의 해석을 손질하며 백제왕이 백제 제후에게 칠지도를 만들게  다음  칼을 왜왕에게 선물했다는 결론(증정설) 도출한 것이다이것은 일본 학계의 입맛에 맞추려고 하는 장팔현의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보인다.

표절사례(22)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백자왕세자’가 왜왕 지를 후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기] 어긋나는 것이며다만 부왕(父王) ‘대왕’만이 그렇게 부를  있는 것이다.(77)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 명문에 있듯이 ‘후왕’이라고 기록된 왜국에 대해 ‘세자’라고 쓰는 것은 [예기] 예로 보아도 있을  없는 일이다.(54쪽)

 위 문장에서 소진철 교수는 “백제의 왕세자가 왜왕을 ‘후왕’으로 부를  없고백제왕만이 그렇게 부를  있다”고 썼는데, 장팔현은  문장을 베끼면서도 “백제 왕제자가 왜왕을 후왕으로 부를  없고다만 자기 왕제자만을 후왕으로 부를  있다”고 고쳐써 교묘히 결론만 바꾸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소진철 교수는 백제왕이 신하인 왜왕에게 직접 칠지도를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반해 장팔현은 백제왕이 왕세자를 시켜 칠지도를 만든 다음 왜왕에게 선물한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장팔현이 이러한 해석을 한 이유는 소진철 교수의 주장은 일본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즉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일본 학계의 입맛에 맞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 다만 장팔현은 한국 귀국 후 다시 고대 일본은 백제의 식민지였다고 자장하고 있다. 

 장팔현 칠지도에 관련된 부분만 보더라도 무려 40군데나 소진철 교수의 논문을 베끼고 결론만 살짝 바꿔서 자기 논문그것도 박사 학위논문을 만들어냈다. 그가 일본에서  논문의 결론 부분은 이렇다

표절사례(23)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고고(考古) 학계에서는, “隅田八幡神社 所藏 人物畵像鏡” 또는 “隅田八幡鏡”이라고 불리우는  銅鏡은鏡背周緣部에 九人의 인물상과 4字의 銘文이 陽鑄되어 있다.

고고학계에서는 우전팔번 신사 소장 화상경 또는 우전팔전경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이 동경은 경배주연부에 9명의 인물상과 48자의 명문이 양추(양각)되어 있다.

그런데 ,  銘文 중에는 干支紀年의 ‘癸未年’과 ‘大王年’, ‘斯麻’와 ‘男弟王’ 그리고 ‘開中費直’  한일 고대사에 있어  번도 찾아볼  없었던 중대한 史實들이 새겨져 있어이를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을 자아내게 한다.(21-22쪽)

명문에는 癸未年大王年斯麻와 男弟王 그리고 開中費直 등의 문구가 있어 한·일 양국의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史料가 되고 있다. (60쪽)

盗用事例(24)

蘇鎮轍教授の論文(1994年)

張八鉉の博士論文(2002年)

古代人が抱いていた青銅鏡の神秘性は、今日を生きるわれわれとしては到底理解が出来ないとある史家は言っている。

古代人が持っていた青銅鏡に関する神秘性を、現代人が理解するのは難しいかも知れない。

とくに上古の倭人たちはその程度が他に比べて甚大だったというから、

特に、古代日本において、その関心は最も高かったといえよう。

「神意」をうけたものとして呪術的性格が与えられたものと信じたようである。

時代が経つにつれて漸次的に呪術的な力を持つようになったと考えられる。

それは一種の「権威の象徴」として、政治権力を生み出すものと信じ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29頁)

従って、自然的に銅鏡は「権力の象徴」として、政治権力をまで生み出す道具になったのである。(60頁)

표절사례(24)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古代人들이 부혀하는 청동경(銅鏡)의 신비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오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일본의 史家들이 말하고 있다.

고대인이 가지고 있었던 청동경에 대한 관심을 현대인이 이해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특히 上古의 倭人들은  정도가 어느 누구보다도 심했다고 하니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특히 고대 일본에 있어 동경에 관한 관심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높았다.

그들에게 銅鏡은 결코 화려한 銅색의 장신구도 아니며……銅鏡은 이상하게도 ‘神威’를 받는 것으로서 呪術的인 성격이 주어진 것이라고 믿는  같다.

그것은 거울이나 화장도구 이외에 시대가 흐름에 따라 첨차 주술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鏡은……정치사회의 확대와 더불어 ‘權威의 상징’으로서 ‘政治權力’을 창출하는 것으로 믿게된 것이다.(29쪽)

장팔현 논문 : 따라서 자연적으로 동경은 “권력의 상징”으로서 정치권력을 탄생시키는 도구로까지 발전하여 쓰였던 것이다. (60-61쪽)

표절사례(25)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隅田八幡鏡에 관해서는이른바 “神功皇后의 三韓征伐”과 관련된 설화가 있으나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23쪽)

1914년, 다카하시 겐지 씨가 신공황후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오래된 거울의 소문을 듣고 우전팔번 신사를 찾아서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62쪽)

표절사례(26)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그는  隅田八幡鏡을 보는 순간, 이는 ……어찌하여 이렇게도 훌륭한 물건이 “아직도 국보로 등록되어 있지 않았는지 실로 놀라운 일”로 생각했다고 한다. (23쪽)

진귀하고 귀중한 사료인 이 거울에 대해 타카하시 씨는 “어찌하여 이렇게 훌륭한 물건이 아직도 국보로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았나? 실로 놀랄 일이다”라 말했다고 한다. (62쪽)

표절사례(27)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銘文 判讀에 대한 高橋의  시도 이후20 동안 일본 학계에는 이렇다할  연구가 없었다.(24쪽)

그러나 명문의 주요 내용을 해석하지 못함으로써 20년 정도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다.(62쪽)

표절사례(28)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그러나 1934(昭和 9당시 金石文의 해석 권위자인 福山敏男 박사는高橋의 判讀을 토대로銘文 判讀에 도전하여마침내 그는 체계적인 판독을 이룩하였다. (24쪽)

1934년 타카하시의 판독을 토대로 해서 후쿠야마 토시오(福山敏男)가 체계적인 판독에 성공함으로써 우전팔번경은 연구대상으로서 급부상했다. (62쪽)

표절사례(29)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男帝王 男弟 단순한 人名으로 보는 해석자도 있으나이는 男弟 의의를 희석시키는 의도이며(33쪽)

남제왕에 관해서는 단순히 인명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왕명으로 볼 것인냐가 중요하다.(67쪽)

표절사례(30)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男弟 문자 그대로 동생의 개념으로 “아랫  뜻하는 古代  정치관행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33쪽)

남제가 문자대로 하남(下男)을 의미할 때는 고대의 정치 관습에 유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67쪽)

표절사례(31)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일찌기景初2(238) 魏志 倭人傳魏帝 使臣  邪馬台國 ‘王’ ‘男帝’ 관계에 대해(33쪽)

예를 들면 경초 2년 [위지][왜인전]에 위제의 사신이 왜국에서 보았던 야마타이국(邪馬台國)에 관한 기록이다. (67쪽)

표절사례(32)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여자를 여자를 으로 받들고 있는데그녀의 이름은 ‘히미고이다

아먀타이국에서는 한 사람의 여자를 왕으로 모시고 있는데, 그녀 름은 코하고이다.

그녀는  도통하고사람을 현혹케 한다. 나이가 찼는데도 시집을 가지 않고나라일은 ‘男弟’(오오토) 있어 그가 도와주고 있다”(33쪽)

그녀는 귀신에 통하고 사람을 현혹시키고 있다. 나이가 들었어도 결혼하지 않고 국가는 男弟(오오토)가 있어 보좌하고 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67쪽)

표절사례(33)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그러므로 보필하는 ‘男弟’ 정무나 군무와 같은 전역을 전담하게 되고,

즉 야마타이국은 여왕과 여왕을 보좌하는 남제가 복수 통치하는 권력 구조이다.

 모름지기 종무에 종사할  있고邪馬臺國 국과 관리는  그를 돕는 ‘男弟’ 공동으로 관리하는 복수통치의 형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33)

여왕인 히미코가 종무(宗務)를 보고 남제가 정무(政務)와 군무(軍務) 등을 분담해서 통치했다는 것이다. (67쪽)

표절사례(34)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男弟王인 繼體의 諱가 [일본서기]에는 ‘男大迹王’古事記에는 ‘哀本杼命’그리고 上宮記에는 ‘乎富等大公王’으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데이는 모두 男弟의 훈의 표기로서…(46쪽)

[일본서기]의 男大迹王, [고사기(古事記)]의 哀本杼命, 그리고 [上宮記]의 乎富等大公王, [筑後風土記]의 雄大迹天皇은 모두 オオト(오오토)로 읽힌다

표절사례(35)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弟國’의 지명은 [日本書紀繼體紀에    나오고 다시   없는데학계에서는 ‘弟國’의 위치를 京都府 長岡京市 乙訓寺 부근이라고 하나   수가 없다.(46쪽)

[日本書紀] 계체 12년 (518)조에 春三月丙辰朔甲子弟國遷都 현재의 京都府 長岡市 乙訓寺<오토쿠니 데라>부근라고 기록되어 있다.(61쪽)

표절사례(36)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銘文의 정당한 해석을 위해서는, 男弟王의 실제를 규명하는 문제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斯麻의 실체를 규명하는 문제이다.(31쪽)

명문 안의 ‘사마(斯麻)’라는 인물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68쪽)

표절사례(37)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왜냐하면그는 우전팔번경의 주체이자 그의 의지에 의해 거울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31쪽)

왜냐하면, 그는 鏡의 제작 주체로서, 隅田八幡鏡은 그의 뜻에 의해서 제작된 것이며, 鏡銘 또한 그가 직접 쓴 것이기 때문이다. 명문 또한 그 자신이 생각해서 지은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해석은 기본적인 전제에 해당된다.(68쪽)

표절사례(38)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그런데, 초기 해석자인 다카하시(高橋)는 銘文을 잘못 판독하여 斯麻 ‘斯麻念長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해석의 실마리를 풀지 못했다.(32쪽)

그러나 초기의 해석에 임한 타카하시는 명문을 잘못 판독하여 斯麻 ‘斯麻念長으로 이해했다. 때문에 해석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68쪽)

표절사례(39)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더불어 발굴된 한장의 誌石이다. 이 誌石에는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年六二歲 癸卯年 五月 丙戌朔七日 壬辰崩이라는 글귀가 있어,

그 중에서 우전팔번경과 관련이 있는 지석도 나타났던 것이다. 거기에는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年六二歲 癸卯年 五月 丙戌朔七日 壬辰崩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이 古墳의 피장자는 百濟國王 제25代 王 武寧(諡號)이며, 그 諱가는 斯麻이고, 梁帝가 내려준 爵號는 寧東大將軍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것은 고분의 피장자가 백제 제25대 무녕왕(시호)이며, 휘는 斯麻이며, 양제가 하사한 작호는 동녕대장군인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일치하는 내용이다.

표절사례(40)

소진철(蘇鎭轍) 교수의 논문(1994년)

장팔현(張八鉉)의 박사 논문(2002년)

사마왕(斯麻王)은 계묘년(서기 523년) 62세로 붕어했다

사마왕(斯麻王)은 계묘년(서기 523년) 62로 붕어한 것이다.

그의 통치 기간은 [백제본기]에 따르면 신사년(501년)에 41세로 왕위에 올랐다고 하니까 22년간 지속된 것이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따르면 신사년(501년), 40세로 즉위하며 22년간 나라를 통치했다.

……王世의 癸卯年은 그가 왕위에 오른지 바로 다음 해의 일이니, 그것은 서기 503년이 되는 것이다.(32쪽)

……계묘년 역시 503년이라는 것을 재확인 수 있는 것이다.(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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